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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을 방문합니다 .
11/06/201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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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강릉에 가면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에 꼭 갈 것을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


시원한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번번히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


 2018년 여름은 상상을 초월하는 더위였기에  강릉에서  2주일 머물며 가보고 싶은 곳을


일일이 다 둘러 보았습니다 . 강릉에서 꼭 가볼 곳으로 여행 팜프렛에 찍힌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  




기념관은 아주 소박합니다 .전통 한옥을 개조한 미니 박물관입니다 .


만화책도 있고 조선시대를 재현한 인형 마네킹도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



교과서에서 달달 외운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은 개혁가로


사회개혁을 몸소 실천한 분입니다 .


조선의 천재 반열에 올랐고 자유로운 사상으로 한 생애를


파격적인 행보로 주목받았습니다 .




정의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 호는 교산()·성소()·학산()·백월거사(). 아버지는 삼척부사를 지낸 허엽()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로서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이다. 이복형으로 허성()이 있고, 동복형제로 허봉(?)과 허난설헌()이 있다.

생애

21세인 1589년(선조 22)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94년(선조 27)에 정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고, 이듬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다가 서울의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 춘추관 기주관()과 형조좌랑을 거쳐 1602년 사복시정을 지냈으며,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었다. 1604년에는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1606년(선조 39) 명()의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삼척부사와 공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모두 파직되었다.

1614년(광해군 5)에는 천추사(使)로, 그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부사(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617년에는 좌참찬이 되었으나 이듬해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으로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동료들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활동사항

1596년에 강릉부사 정구()와 함께 『강릉지()』를 엮었다. 1603년(선조 36)에는 대관령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를 보고 「대령산신찬병서()」를 지었다.

학문과 사상

학문은 유성룡()에게서 배웠고, 시는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이달()에게서 배웠다. 허균은 「학론()」·「정론()」·「유재론()」·「호민론()」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문인으로서도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저술

문집으로 『성소부부고(?)』가 있으며, 시평론집 『학산초담()』을 남겼다. 이 외에 『고시선()』·『당시선()』·『송오가시초()』·『명사가시선()』·『사체성당()』 등의 시선집을 남겼는데 전하지는 않는다.

작품

조선시대의 대표적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남겼다. 「홍길동전」에서는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허균 [許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허난설헌 역시 천재 시인으로 허균의 누이로  유명합니다 .


그럼 시한편 먼저 감상해  볼까요 .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

? [감우(感遇)] 허난설헌

[네이버 지식백과] 허난설헌 [許蘭雪軒] - 조선중기 천재 여류시인 (인물한국사)







좀더 네이버 지식인의 도움을 받아보겠습니다 .


<허난설헌은 시 속에 나오는 난초같이 살다간 시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당호가 난설헌(蘭雪軒)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은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고려시대 비교적 분방하던 여성들의 삶은 가부장 중심의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이념체계 안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점차로 위축되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집안을 지키고 후세를 낳아 기르는 역할만을 맡아 이것에 순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속에서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시를 쓰고 이를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기에 남성 중심의 가치체계가 확고해지던 조선중기, 허난설헌이라는 여류시인의 등장과 그 삶의 궤적은 그녀의 천재성과 함께 당시 여성들의 고통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허난설헌의 존재가 독특한 것은 그녀가 사대부가의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곧게 그녀가 창작한 시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데 있다. 허난설헌은 왜곡된 형태이긴 하나 제한적으로 사회활동이 자유로워 문재를 뽐내는 것이 가능하던 황진이 같은 기생도 아니었고,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같은 훌륭한 자식을 길러낸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신사임당처럼 부덕을 상징하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시로서 그 이름을 남겼고 훗날 그녀의 시는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지식인 문인들에게 격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애송되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 속에서 성장

허난설헌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동과 서로 사림들이 붕당된 후 동인의 영수가 된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양천 허씨이며 어렸을 때 이름은 초희였다. 당시 여성들이 거의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지 못하였던 데 비해 허난설헌이 초희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볼 때 그녀의 집안은 당대 여타 사대부 가문에 비해 여성에게 관대하였던 것 같다. 허엽은 동인 중에서도 북인계에 가까운 인물로 북인들은 대개 그 사상적 기저가 성리학 이념 하나에만 고착되지 않고 여러 분야에 비교적 열려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허엽 가문의 학문에 대한 열린 가풍은 딸 허난설헌에게 남자와 똑같은 교육기회를 주었으며, 아들들에게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질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당대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은 허성, 허봉이 허난설헌의 오빠이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가족 중에서 허난설헌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은 둘째 오빠 하곡 허봉으로, 허봉은 여동생의 문재를 일찍이 알아보고 이를 독려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이달에게 여동생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이달은 뛰어난 문학성을 가졌으나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나 벼슬길이 막힌 불운한 시인이었다. 그는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지어 선조 때의 삼당파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허난설헌과 허균 남매를 가르쳐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허난설헌은 나이 8세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한시를 지어 주변의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시는 신선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아 그 상량문을 지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어린 허난설헌은 현실의 어린이의 한계와 여성의 굴레를 모두 벗어버리고 가상의 신선세계에서 주인공이 되는 자신을 과감히 표현하여 신동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렇듯 허난설헌은 훗날 조선후기 문인 서포 김만중이 논하였듯이 가문과 스승의 격려 속에서 조선시대 규중의 유일한 여류 시인으로 성장하여 갔다.


불행한 결혼생활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했다. 김성립은 안동 김씨로 그녀보다 한 살이 많았다. 김성립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명문 가문의 자제였다. 당시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된 상황에서 동인은 또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는데 김성립은 남인계에 속한 인물이었다. 당시 남인은 북인보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에 더 고착되어 있었고 보수적이었다. 자유로운 가풍을 가진 친정에서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 온 허난설헌은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양반가의 여성에게조차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쓰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지식인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남편 김성립은 그런 그녀를 보듬어주기보다는 과거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하였다. 뛰어난 오빠와 남동생을 보고 성장한 허난설헌에게 평범한 김성립은 성에 차지 않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8세 때 이미 신동이라고 소문난 아내를 김성립은 버거워했다.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훗날 자신의 매형인 김성립에 대해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한다”고 평하였는데, 이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립은 무뚝뚝하고 별다른 재기는 없는, 고집 세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허난설헌은 결혼 초기에 바깥으로 도는 남편을 그리는 연문의 시를 짓기도 하였으나, 어느 순간 김성립과의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 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그러는 사이, 허난설헌의 친정은 아버지 허엽과 따르던 오빠 허봉의 잇따른 객사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허난설헌은 두 명의 아이를 돌림병으로 잇달아 잃고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는 불행을 당한다. 이때의 슬픔을 그녀는 [곡자]라는 시로 남겨놓았다.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통이 좁은 남편,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등으로 허난설헌은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시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 사후 남양 홍씨와 재혼하였지만 곧이어 터진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싸우다 전사하였다.


중국과 일본까지 알려진 허난설헌의 시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시는 족히 방 한 칸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시집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태웠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은 찬란한 천재성을 가진 누이의 작품들이 불꽃 속에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가 친정 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다.

1606년 허균은 그 시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에게 일람하게 하였다. 당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매우 경탄하였다. 그리고 이를 중국에 가져가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다. 그녀의 시는 일약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중국의 문인들이 앞을 다투어 그녀의 시를 격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애송되던 허난설헌의 시는 18세기에 가서 동래에 무역차 나온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시는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난설헌의 시는 조선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였다. 다만, 중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시들 속에 중국의 당시를 참고한 듯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난설헌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그녀의 시집이 동생 허균에 의해 간행된 만큼 편집에 있어서 일부는 허균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중기,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뛰어남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전체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허난설헌 [許蘭雪軒] - 조선중기 천재 여류시인 (인물한국사)





기념공원 드넓은 정원에 허난설헌 동상도 있습니다 .


책을 들고 앉은 여류시인은 고결해 머리숙여 경배했습니다 .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입니다 . 강릉에서는 역사공부를 알차게 할 수 있어서


자녀들을 데리고 여행하기에 아주 유익한 도시입니다 .








허균 ,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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