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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집콕 위기에 이런 글을 읽다 .
03/27/202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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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국의 코로나 19 감염으로


라스베이거스 도시 전체가 셧다운된


위기속에서 방콕, 집콕을 하다보니


뉴스와 영화 , 책을 평소보다 더 가까이하게 되었다 .


미국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지인의 말씀은


지금의 위기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1 ,2차 오일쇼크


석유파동이라고 ...


그 때는 자동차 오일 , 개스를 제한해 공급했기에


매일 개스 스테이션에서 줄지어 있는 사람들 속에서 


맘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







나도 처음 미국에 와서 겪은 공포는 


LA폭동과 밸리 , 노스리지 6.7도 지진이었다 .   


최근에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본 다큐 영화는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천신만고의 노역을 겪은 

우즈베키스탄 소녀의 스토리였는데



알래스카 북단으로까지 끌려가  사경을 헤매는 ,

그야말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본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


소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련 장교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


" 아무 이유 없이 여기까지 끌려온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은 지금 모두 다 얼어 죽어가고 있어요 .

우리에게 담요와 비타민을 공급해주세요 "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미국에서 흔하게 살 수 있는

비타민이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생명의 약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








그리고 히틀러의 만행을 담은 영화와 역사책은 

너무나 잔인해서  읽으면서도  몇 번이나 믿을 수가 없었다 .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대량학살을 위해 사용된 지클론 B. 이 제품은 처음에 해충방제를 목적으로 한 프랑크푸르트 회사가 개발했던 것인데, 나치에서 이를 인간학살을 위해 사용했다. >


<가스학살은 총알도 인력도 시간도 드는 총살보다

여러모로 효율적인 학살법이었던 것.

1941년 아우슈비츠 이후 다른 수용소에서도 자행된

이 가스학살로 아유슈비츠에서만 110만명이 살해당한다.>






내가 어제 포스팅한 글 속에 '잭런던의 리포트' 이야기를 읽고 친구가

이 시기에 위안이 되었다고 응원해 주어

샌프란시스코 지진 이야기를 좀더 스크랩 해본다 .


"샌프란시스코가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추억, 그리고 외곽의 주택 약간뿐이다. 공업구역, 유흥가와 주택가, 공장과 창고, 대형 상점과 신문사 사옥들, 호텔과 대저택들도 모두 없어졌다. 샌프란시스코라 불리는 도시의 외곽 주택가가 여기저기 조금씩 남아있을 뿐이다.”(잭 런던, 콜리어스 위클리 1906년 5월 5일자)

『야성의 절규(The Call of the wild)』와 『강철군화(The Iron Heel)』 등의 소설을 지은 작가 잭 런던은 20세기 초 미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에서 잠시 기자생활을 했다. 러일전쟁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의 종군기자로 조선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1906년 4월 17일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지진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기록을 ‘콜리어스 위클리’라는 잡지에 남기고 있기도 하다. 이 기사는 뛰어난 소설가가 남긴 당대의 대재앙의 역사기록이다.


<미국의 파리를 파괴해 버린 충격파와 들불>
 

샌프란시스코의 (이그재미너)지 사회부 기자 존 배럿은 1906년 4월 17--18일 화요일 야간 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다. 배럿은 오전 5시에 일을 끝내고 두 기자와 이야기를 하며 마켓가로 나섰다. 아침 안개가 걷히고 햇빛이 비치면서 건물들 지붕이 환하게 빛났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신문이나 우유를 실은 수레의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도시는 고요했다. 한 사람이 재담을 하여 다른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웃음소리가 멎었다. 배럿은 이렇게 썼다.  갑자기 우리 몸이 비틀거렸다. 마치 우리 발밑에서 땅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간 것 같았다. 순간 땅이 크게 흔들렸다. 우리는 구역질을 느끼며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거리에서 몸부림을 쳤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리벙벙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적으로 커다란 건물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게 보였다. 이어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에 내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커다란 건물들이 손에서 비스킷이 으깨지듯 가루가 되고 있었다...


돌 조각이 폭우처럼 거리로 쏟아졌다. 유리가 깨지는 거칠고 날카로운 소리가 무시무시한 굉음 속에 묻혀 버렸다. 내 눈앞에서 거대한 처마 장식이 떨어지며 어떤 사람을 구더기처럼 짓누르고 있었다--겨드랑이에 도시락을 끼고 유니언 제철소로 일을 하러 가던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였다...15분이 지나서야 땅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한 3분 정도 지속되었을 뿐이다. 다시 땅에 단단하게 발을 디딜 수 있을 것 같아 일어섰으나 되풀이되는 충격으로 다시 비틀거렸다. 그러나 이번의 충격은 좀 약했다. 뭔가를 붙잡으면 일어설 수는 있었다.
 

배럿은 여명처럼 어두컴컴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배럿은 전차의 철로들이 뽑혀 기괴하게 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도로의  넓게 찢어진 상처 도 보았으며 전선들이 제멋대로 꼬여있는 것도 보았다. 어떤 전선들은 축 늘어져 파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갈라진 틈에서는 물이 솟아나왔다. 깨진 관에서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가스가 솟아올랐다.
  

남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것이 인간들이 고통을 못이겨 지르는 끔찍한 소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아래 빈민가에서는 집이 파괴되면서 잠자고 있던 가족을 덮치기도 했다. 또 저쪽에서는 하루 종일 불길이 치솟았다...바로 그게 다음에 찾아온 것이었다--사방에서 불이 났던 것이다. 격렬한 파괴의 파동은 횃불을 동반하고 온 것이었다--괴로움, 죽음, 그리고 치솟는 불길, 마치 어떤 불의 악마가 횃불을 들고 이곳저곳에서 날뛰고 있는 것 같았다.
 

역사가 60면밖에 안 되었지만 이미  미국의 파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 대도시는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금융, 상업, 문화의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국내외 무역에 있어서 뉴욕 다음가는 도시였으며 또한 초기의 대륙횡단 철도의 서부 종착역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또한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45만의 인구를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곳은 미국인, 멕시코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이 뒤섞여 살고 있는 인종의 용광로였다. 또한 미국에서 가장 큰 중국인 집단 거주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또 어떤 이들에게는 사악한 도시였다--1000개의 술집과 위층에  침실 이 딸린 사치스러운 레스토랑들, 그리고 악명 높은 바바리해안이 있는 밤의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문화를 아는 신흥 부호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인기 오페라 가수들이 수입되어 왔다. 사교 시즌에는 사치스런 무도회가 열리기도 했다. 800개의 객실을 갖춘 마켓가의 팰리스호텔은 그 호화로움과 서비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물론 이 도시의 스타일과 번영은 대부분 그 지리적 특성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길이가 80km 가량 되는 반도의 북단에 자리잡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이 있고 동쪽으로는 샌프란시스코만과 선창들, 부두, 페리 정기 여객선들이 있었다.


높은 언덕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중 한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샌프란시스코는 거대한 단층과 인접해 있었다--북 캘리포니아의 멘데치노곶에서 시작되어 대체로 캘리포니아주와 평행를 이루며 약 1300km를 달리는 산안드레아스 단층이 그것이다.
 

1906년 4월 18일 아침, 이 단층내에 축적된 압력과 긴장은 2차세계대전시의 모든 폭발물의 에너지를 능가하는 힘으로 터져 나왔다. 그 힘은 샌프란시스코의 북쪽 145km 지점의 해안으로 몰려들어 초속 약 3km 속도로 남쪽으로 땅을 가르며 내려갔다. 오전 5시 13분 그 충격파는 엄청난 힘으로 도시를 강타했다.
 

그날 아침 팰리스 호텔의투숙객 가운데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있었다. 카루소는 전날 밤 샌프란시스코의 그랜드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했다. 카루소는 나중에 지진이 일어나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내 침대가 마치 배처럼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창밖을 보니 건물들이 흔들리고 커다란 돌조각들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거리로 달려나갔다. 그날 밤 나는 딱딱한 땅바닥에서 잠을 잤다--그렇게 등걸잠을 자서 나는 아직도 다리가 아프다.
 

오전 6시 팰리스호텔 앞의 마켓가 건너편에 있던 우편전신회사의 책임자는 전국에 다음과 같은 첫 소식을 타전했다.
 

오늘 아침 5시 15분 지진이 발생하여 몇 개의 건물이 부서졌다. 우리 사무실 건물 역시 부서졌다.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에서 사망자들을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다. 도시 전역에 화재가 발생했다. 몇 분마다 약간씩 진동이 있기 때문에 나도 사무실에서 나갈 작정이다.
 

지진이 일어난 지 30분 만에 50건이 넘는 화재가 발생했다. 전기가 흐르는 전선이 나무에 닿거나 빠져나온 가스에 불이 붙거나 난로들이 쓰러지면서 불이 붙은 석탄을 쏟아놓거나 하는 바람에 일어난 화재들이었다. 각각 따로 일어났던 수만은 불이 곧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대화재로 커졌다. 2--3시경에 번화가의 사업 지구는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초저녁에는 불길이 차이나타운에까지 번져 노브힐의 저택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목요일 새벽에는 바바리해안에 불이 붙었다. 치솟는 불기둥이 160km 떨어진 바다에서도 보였다. 강철 I--빔들이 녹았다. 은행의 은화들은 녹아 은괴가 되어 버렸다. 과열된 은행 지하 금고는 며칠 동안 열 수가 없었다.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면 지폐와 서류들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기 때문이다.
 

13년간 샌프란시스코의 소방대장을 맡아 온 데니스 설리번은 80개의 소방서와 585명의 소방수를 거느리고 있었다. 설리번의 소방대는 전국에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소방대로 꼽혔으나 설리번은 자신의 소방대의 결함, 그리고 도시가 화재로 인해 직면한 심각한 위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건물들의 90퍼센트는 완전히 목조이거나 벽돌로 외장을 한 목조였다. 그리고 이 도시의 소방 장비는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4월 17일 화요일 저녁, 설리번과 그의 아내는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설리번은 모임 장소를 떠나 두 건의 화재 진압 현장을 둘러보고 오전 3시 근처 소방서의 아파트로 쉬러 갔다. 5시13분 설리번은 침대가 흔들리고 벽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설리번은 어둠 속을 뛰어가 옆방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건물이 무너져 문 밖은 허공이었다. 설리번은 그대로 3층에서 소방차로 떨어지고 말았다. 설리번은 두개골, 갈비뼈, 팔, 다리의 골절로 고생하다가 일요일에 죽고 말았다.
 

설리번의 부하들은 초기에 화재를 진압하려 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다. 그들의 소방차와 말들은 쓸모가 없었다. 지하의 쇠로 된 주관과 수도 도관들이 지진으로 휘고 깨져 물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재 현장 근처의 몇 개 안되는 물탱크는 곧 바닥이 나 버렸다. 오후 12시 45분 프레드릭 펀스턴 장군의 명령에 따라 극단적인 방법이 취해졌다--불길의 진행 방향에 있는 건물을 철거함으로써 불길을 잡으려 한 것이다.
 

글 지역의 고급 장교였던 펀스턴 장군은 초기에 화재를 진압하고 이재민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연락을 취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펀스턴 장군은 권한은 없었지만 사실상의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금문교 근처의 군사 주둔지인 프레지디오에 주둔한 육군 병력 2000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재난이 일어난 후 첫 사흘간 도시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움직이면서 서로 밀고 당기는 사람들, 재산을 운반하는 사람들, 친척을 찾는 사람들, 먹을 것과 물과 피할 곳을 찾는 사람들, 탁 트인 안전한 공원을 찾아 밀려드는 사람들, 북쪽 해안을 빙 돌아 약 10km를 걸어 페리 하우스로 가는 사람들, 목격자들은 모두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기가 죽어 있었고 술이나 약에 취한 듯 생각에 잠겨 말없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말한다.


작가 잭 런던은 (콜리어즈 위클리)에 이렇게 묘사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온 도시가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 폐허로 변하던 수요일 밤은 조용한 밤이었다. 외치는 소리나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없었다. 히스테리나 무질서도 없었다...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기 전에 수만 명의 집을 잃은 사람들이 밤새도록 피난을 갔다. 어떤 사람들은 담요로 몸을 싸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침구와 귀중한 가보를 들고 가기도 했다. 때로는 온 가족이 자신들의 재산의 무게로 내려앉을 것 같은 마차나 배달 수레를 말처럼 끌고 가기도 했다.
 

동시에, 흥분하여 구경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도시를 둘러싼 언덕 위에 서서 불이 번지는 것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고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심지어 피난민 가운데도 일종의 환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목격자인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친절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백 명의 집 잃은 사람들에게서 나는 흐느끼는 소리나 애처로운 하소연을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대신 계산을 넘어 서로 도와주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혼란의 도가니 어딘가에는 24세의 미남 배우 존 배리모도 있었다. 배리모는 지진 직후 성프랜시스호텔을 나서는 것이 목격 되었으나 그 이후 이틀 동안 실종자의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 당시 배리모는 한 친구의 집에서 주연에 탐닉해 있었던 것이다. 배리모는 그후 주연에 빠져 사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하룻밤 새에 거리와 공원은 집을 잃고 굶주린 엄청난 수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동안에 1000대가 넘는 열차에 실린 피난민들이 서던퍼시픽 철도를 통해 도시에서 피신했다. 철도 회사에서는 운임을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약 30만명의 집을 잃고 굶주린 사람들은 도시의 공원들로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과 위생 시설을 제공하고 병자와 부상자를 돌보고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군대는 하룻밤 새에 도시 곳곳에 천막을 쳤다. 첫 구조 열차는 지진 발생 후 19시간 후인 수요일 자정에 도착했다. 적십자사는 그 보급품을 이용하여 24시간 음식을 제공하는 장소들을 개설하였다. 다른 보급 열차들이 그 뒤에 속속 도착했다. 철도는 그 기차들의 통행에 최우선권을 부여하였다. 병사들은 감옥의 조수들을 동원하여 무덤을 파도록 했다. 집을 잃은 아이들은 오클랜드의 임시 수용소에서 돌보았다.
 

펀스턴 장군은 목요일인 19일 오후에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불이 밴네스가 동쪽의 넓은 지역을 유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불길은 서쪽으로 번지며 밴네스로 향하고 있었다. 벤네스가는 구도시와 신개발 지역을 가르며 남북으로 뚫린 도로였다. 그 신개발 지역에는 15만명의 고소득층이 모여 사는 웨스턴 어디션이 있었다. 만일 불길이 밴네스가를 건너게 되면 샌프란시스코 전체가 불에 타는 셈이었다. 밴네스가는 이 도시에서 폭이 제일 넓었다--약 45m였다. 그것은 최후의 방어선이었으며, 논리적으로도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었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밴네스가의 동부에 있는 모든 건물의 거주자들은 서둘러 소개되었다. 파괴될 운명의 거주지를 따라 대포가 일렬로 늘어섰다. 군인들이 성냥과 등유 깡통을 들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적당한 장소에는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했다. 방화를 하고 폭약을 터뜨리고 포를 발사한 결과, 길이 16블록--1.6km--폭 46m에 걸쳐 도시에서 가장 좋은 새 집들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 덕분에 다가오는 불길과 밴네스가 서부의 건물들 사이에 폭 52m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금요일 오후, 파괴되지 않은 밴네스가의 서쪽 부분으로 불길이 아주 가깝게 접근했다.  집의 페인트 칠이 녹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불길은 멀어지고 벤네스 저지선은 성공했다. 다른 곳에서는 아직도 불이 위험하게 타오르면서 부두로 접근해 샌프란시스코의 경제적 생명선인 선창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도시의 소방차들이 만에서 소금물을 길어 올릴 수 있었다. 또한 해군 소방선도 도와준 덕분에 소방대는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마지막 불길은 4월 21일 토요일 아침 7시 45분에 진화되었다.
 

이제 지진과 사흘 낮 사흘 밤의 화재로 인한 사망자 수를 헤아리고 피해를 결산할 시간이 왔다.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사망자 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추정치도 각기 달랐다. 대략 500명이 깔리거나 갇히거나 불에 타 숨진 것 같았다. 그 외에 350명이 실종되었으나 발견되지 않았고 415명이 중상을 입었다.
 

도시의 중심부는 폐허가 되었다. 512개의 블록에서 2만 8188동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사업 및 상업 지역 전체가 파괴되었다. 좀 크다 싶은 소매상들은 전부 불에 탔다. 단 하나의 은행 건물만이 심한 피해를 면했다. 마켓가는 숯이 된 목재, 뒤틀린 쇠, 깨진 유리, 벽돌 더미에 묻혀 좁은 오솔길이 되어 버렸다.



국민학교 건물 29개동이 파괴되었으며 44개동이 손상을 입었다. 거의 도시의 4분의 3을 재건축하거나 광범위하게 수리하여야 했다. 보험금 요구는 총 2억 2900만 달러에 달했는데 이것은 1988년 시가로 환산하면 30억 달러에 가까운 액수다. 이것 외에 보험에 들지 않은 재산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으로 큰 지진을 겪은 높은 강철 구조물들은 잘 견뎌냈다. 이 건물들은 소수의 부상자만 내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손상을 입었다--그것도 대부분이 화재에 의한 것이었다. 최악의 파괴는  인공 육지 , 즉 만의 습지에 흙을 채워 만든 지역에서 발생했다. 건물이 가장 쉽게 무너진 곳은 그 지역이었다.

   

화재는 진화되었지만 엄청난 곤경이 여전히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다시 도시로 밀려들어와 지속적인 대규모의 구조 사업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급수 탱크에 물을 길어 올릴수가 없었다. 만 3000채 이상의 주택의 수도 꼭지가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주관에서 상수와 하수가 섞여 버렸다. 굴뚝의 안전 점검을 하기 전에는 어느 집에서도 불을 피울 수가 없었으며, 집을 검사하기 전에는 가스와 전기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모든 조리는 야외에서 해야 했다. 조리 기구는 계속 부족했다.
 

그럼에도 회복과 재건은 즉시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샌프란시스코를 재건하는 데 보여준 그 정신만큼 샌프란시스코에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일꾼들은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계속 일하여 파편들을 치웠다.


그 대부분은 얕은 만에 버려졌으며 시간이 지나 그 매립지는 원래의 해안선을 계속 밖으로 밀어내며 확장되었고 그곳에는 주택 단지들이 들어섰다. 사업은 일주일내에 재개되었다. 두 달 안에, 8000동 이상의  이재민 주택 --긴 나무 막사--이 세워졌다. 각 막사에는 여섯에서 여덟 가구가 들어갔다.


군대는 7월 1일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7월 5일 술집들의 영업 재개가 허용되었다. 급식소는 8월 1일에 문을 닫았다. 전국 및 해외(중국 황후가 보낸 4만 5000달러, 일본 적십자사가 보낸 24만 5000달러 등)에서 보내온 900만 달러 이상의 성금이 구조 사업에 도움을 주었다.
 

1907년 봄이 되자 파편들은 거의 사라졌다. 세번째 해가 끝날 무렵에는 엄청난 건설 불이 일어 2만채의 좋은 새집들이 지어졌다. 건축 자재 공장들은 2교대로 일을 해 나갔다. 석공들은 하루 8시간 일하고 12달러--보통 임금의 3배가 넘는 액수였다--씩이나 받았다. 어떤 석공들은 하루 18시간 일을 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는 10년 뒤에 대규모의 파나마--태평양 박람회를 개최하겠다는 발표를 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예정대로 개최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대지진 며칠 뒤, 이 도시에 살고 있던 뉴욕 신문의 기자는 샌프란시스코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금문교 옆의 그 독특한 도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과 아라비안 나이트의 맛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가 절대로 예전과 똑같은 도시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기자의 슬픔은 정말 절절한 것이었지만 때 이른 한탄에 불과했다.

   

산안드레아스 단층
 

지구의 표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층들로 봉해져 있다--이곳은 지각의 운동이 일어나는 골절 부위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단층들은 과거 지속적으로 바위가 형성되던 때 바위간에 단절이 생겨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산안드레아스 단층은 지구의 외각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두껍고 딱딱한 판 가운데 두 개가 만나는 불안한 지점이다. 단층의 동쪽으로는 북아메리카판이 캘리포니아 거의 전체를 따라 1300km 가까운 길이로 놓여 있다. 서쪽으로는 태평양판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로스앤젤레스나 샌디에이고와 같은 도시들이 서 있다.
 

북아메리카판은 이 단층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남동쪽으로 움직은 반면, 태평양판은 북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층의 일부분에서는 두 판이 서로의 위에 겹쳐져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도 하며, 1년에 5cm씩 움직이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지난 1500만 내지 2000만 년 동안 그런 움직임을 다 합치면 적어도 563km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지진 현재까지도 진행중인 자연재해. 미국의 역사 샌프란시스코 지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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