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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3가 나들이
05/15/201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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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성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던 종루가 있는 거리

종로의 세 번째 구획에 해당된 데서 유래된 종로3가는

내 청춘의 한시대를 간직한  플라타나스 가로수의 거리다 .

주말이면 피카디리 극장과 단성사 극장은 데이트하는 대학생들로

싱그러운 물결이 팝송을 부르고 '토요일 밤의 열기'를 연출했었다 .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 그리운 사람끼리 두손을 잡고 마주보고..."


"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


청아하고 촉촉한 박인희 씨의 노래 구절 구절이 골목 , 신호등마다 스쳐간다 .  







내가 찾고 싶은 비원 앞 중국 호떡집은  이미 사라져 자취도 없고,   


종로3가 뒷골목에 꿋꿋히 자리잡은 70년 전통 영춘옥에서 해장국 한그릇 먹고


 새로 단장한 단성사 영화 박물관을 구경한다 .








자동차 사고로 죽은 이유없는 반항, 에덴의 동쪽, 자이안트의

흘러간 영화 포스터속에서 불멸의 배우.  제임스 딘 .  포스는 여전히 살아있다 .

 



약 20년전 , 내가 외롭고 아프고 힘든 세월을 캘리포니아 1번도로


구석구석을 탐구생활로 달래던 중 주유소를 찾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다 . 


살리나스 언덕과 산길을 헤매고 캄캄해진 들판에서 절망으로 울부짖고 있을  때,  


파소 로블스 근교 허름한 카페에서 나는 만났다 . 영원한 미국 청년의 우상, 


스피드 광  제임스 딘.  죽음의 현장에 세워진 묘비를 ...


그리고 오늘 종로 3가 단성사 극장 영화포스터와 


테평양 하이웨이 46번 & 41번이 교차하는 지점은 


나를  삶과 죽음과 영화 예술 . 많은  상념에 잠기게 한다 .





서울 역사 박물관은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가 단성사에서 상영된 100주년을 맞아 단성사의 역사와 단성사와 함께 했던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단성사와 한국영화상영 100주년> 전시회장이다  . 


단성사가 명실상부 최고의 상설 영화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소속 나운규가 감독·출연한 <아리랑> 이후다. 아리랑은 개봉 첫날부터 유례없는 인기를 끌었고, 관객이 몰려 종로 거리에 길게 줄을 서기 일쑤였다고 전해진다.



1950년대 중반에 단성사에서 상영된 작품으로는 사극영화와 멜로 드라마로 ‘왕자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다정도 병이련가’(1957) 등이 있다.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단성사는 제2의 전성기라고 불릴 만큼 호황을 누렸다.


당시 단성사에서의 상영은 영화흥행의 보증수표로 인식되었는데,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등 히트작들이 잇달아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영화 박물관 곳곳에 단성사 역사를 소개한 안내판이 있다 .


광복 이후 단성사


광복 이후에는 민족의 수난과 항일 투쟁, 독립을 향한 갈망, 향토 재건 등 애국심을 고취한 일련의 광복영화가 쏟아졌다. 단성사에서 1948년에 상영된 <독립전야>도 그러했다. 한국 영화의 부흥이 막 이뤄지던 찰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잠시 주춤했고, 1950년대 중반 영화인들이 현장에 복귀하면서 한국 영화는 비로소 중흥기에 돌입하게 된다.

 

신상옥·김기영·유현목 등이 감독에 입문했으며 김소동·홍성기·이강천·김성민 등이 가세해 작품의 질도 높아졌다. 당시에는 사극과 멜로드라마가 흥행을 이끌었다. 이때 단성사에서 상영된 작품으로 <왕자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다정도 병이련가>(1957)등이 있다.


1907년에 설립된 단성사는 박성필이 운영을 맡으며 1918년 상설영화관으로 재개관하였고, 최초의 한국영화 1919년 ‘의리적 구토’ 상영 이후, ‘장화홍련전’(1924), 나운규의 ‘아리랑’(1926),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 등을 제작·상영했다.


이처럼 흥행의 중심이던 단성사는 1932년 박승필 사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9년 6월 일본인 이시바시 료스케가 인수해 ‘대륙 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광복 후 1946년 1월에 단성사라는 이름을 다시 찾았다.






이밖에도 내가 모르는 역사의 현장이 바로 종로3가,  단성사 극장 자리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종로3가 [鐘路3街] 유래를 읽어본다 .


 

<종로3가는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 4월 1일 한성부 5부 방명의 표지를 세울 때 한성부 중부정선방 · 경행방 · 장통방 일부 지역에 속하였고,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중부 정선방의 대묘동계, 경행방의 오순덕계, 장통방의 비파동계 · 광주주인계 · 입전계 · 의성정계 · 서천수계였다.

고종 4년(1867)에 간행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중부 정선방의 대묘동계, 경행방의 오순덕계, 장통방의 비파동계 · 광주주인계 · 입전계 · 의성정계로 기록되어 있고,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한성부
중서() 정선방에서는 대묘동계의 묘동, 금만년계의 대묘동, 장통방에서는 서천수계의 입동, 입동계포병동 · 모곡동, 입전계의 피마동, 의성정계의 피마동 · 중부동 · 하판교, 광주주인계의 중부동 · 상판동 · 모곡동 · 비파동, 경행방에서 동구계주동, 오순덕계의 교동, 탑동계의 교동이 해당되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한성부 중서에서 경성부 중부로 바뀌었고,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개편된 중부의 피마동과 포병동 · 비파동 · 모곡동 ·
상판교 · 중부동 · 교동 · 주동 · 묘동 · 하판교 · 입동 각 일부 지역이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따라 새로 통합되면서 종로3정목으로 칭하였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한 구제도() 실시로 종로구가 신설되면서 경성부 종로구 종로3정목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종로3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종로3가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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