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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성자 바울의 진짜 정체는?
09/19/201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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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성자 바울의 진짜 정체는?        

 

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다섯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인문학의 스타가 되었습니까?"

철학자 서동욱 교수가 답합니다. "지금 필요한 인문학의 무기는 망치입니다. 그런데 그 망치를 쥔 사상가가 바로 바울입니다!"

<편집자>

 

네바 강을 건너는 사도 바울

 

'절망의 인문학'은 고약하다. 그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장사가 안 된다는 우는 소리에서 시작해서 인문학 붐과 함께 웃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확산의 길을 가고 있는 이 인문학은 어떤 인문학이며 사람들은 왜 그것을 원하는가? 이것은 혹시 조기 영어 교육, 웰빙, 헬스, 사교댄스 같은 삶의 보약 또는 더 고약하게는 기업가의 숨겨진 수익 창출 비결 같은 것인가? 그것은 뇌관이 제거된 인문학이 아니던가?

우리는 머리에 달린 심지에 불꽃을 매단 다이너마이트 같은 인문학자들을 기억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름으로, 스피노자의 이름으로, 니체의 이름으로 출현한 이 폭약과도 같은 인문학은 사회에 통용되는 가치를 학습시키는 대신에 기존의 가치들의 어두운 얼굴을 드러내 그것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위험한 일에 손을 대는 인문학, 고유한 비판 정신으로 자신을 지켜 온 인문학이 무장 해제된 채 고작 '클리세이(cliche)의 전도사'로 나선다면 어떨까? 그 때 인문학은 아무리 널리 확산되더라도, 고약하게도 '절망의 인문학'이란 정당한 명칭으로 불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에 관심을 쏟는 일은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바울에 관한 책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느낄 당혹감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이름이 종종 교회, 도덕적 규율, 사회적 보수주의 등 그리스도교의 가장 제도적이고 가장 폐쇄적인 측면들과 결부되어 있어 한층 더 의심쩍은 이 '사도'가 왜 필요한 것일까?"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는 폐쇄적인 보수주의를 더 잘 익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 바울은 기존의 가치를 계속 통용시키려는 보수주의자였는가?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로 돌아가 보면 오히려 그는 자기 종교의 문을 닫고 새 종교를 창시하는 혁명을 완수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문학―만일 이 성자의 사상을 인문학의 하나로 편입시키는 불경이 허락된다면 잠시 이렇게 부르자―을 자기가 안락하게 몸담을 수도 있었을 공동체의 주도적인 가치에 봉사하도록 하지도 않았다.

투옥됐습니다.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파선을 당해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녔죠. 강도에게 위협을 당했고, 주리고 목마르고 추위에 헐벗었습니다.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이야기다. 바울의 저 초상화는 당대의 법과 가치를 수호하는 관료의 모습이 아니라, 한쪽 주머니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넣고 다른 쪽 주머니엔 브라우닝 권총을 집어넣은 채 네바 강을 건너던 또 한 사람의 사도, 레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구체적 일상을 혁명의 제물로 내주려는 계획
 

국내에서 몇 해 전부터 사도 바울에 관한 깊이 있는 현대 철학 연구서들이 번역 소개되면서 그의 혁신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늘 날 진보적인 철학적 사유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바울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서로 바디우의 <사도 바울 : 보편주의의 수립>(현상환 옮김, 새물결 펴냄),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 : 로마서에 관한 강의>(강승훈 옮김, 코나투스 펴냄)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슬라보에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김정아 옮김, 길 펴냄) 역시 기독교 전반을 다루며 바울을 중요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울러 최근 국내 소개된 주목할 만한 강의록들이 바울을 다루고 있는데, 마르틴 하이데거의 <종교적 삶의 현상학>(김재철 옮김, 누멘 펴냄) 그리고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 신학>(조효원 옮김, 그린비 펴냄)이 그것이다. 전자는 1920년과 21년에 걸친 프라이부르크 대학 겨울 학기의 강의록이고, 후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1987년 투병 중 행해진 강의를 정리한 것으로 강연 직후 사망한 타우베스의 유언과도 같다.

과연 사도 바울이 인문학의 영역에서 해방의 출구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 줄 수 있을까? 아마도 한 가지 유명한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의 진보성의 핵심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십시오. (…)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Ⅰ 고린토' 7 : 29~31)

소명을 받았을 때 '마치 ~가 아닌 것처럼 살아라' 하는,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삶의 형식은 서구 사유의 역사에 얼마나 깊이 침투해 들어갔는가?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의 참다운 의미를 잃고 있는 비본래적 상태로부터 본래적 실존으로 나아가고자 하면서, 본래적 실존을 이렇게 설명한다.

"본래적인 실존이라는 것도 추락해 있는 일상성 위를 떠다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실존론적으로 단지 이 일상의 변양된 장악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본래적 실존은 비본래적인 일상적 삶의 자리와 완전히 다른 것이기보다는, 이 일상적 삶은 다른 방식으로 장악하는 데서 성취된다. 바울 식으로 이야기하면, 비본래적인 일상적 삶을 비본래적이지 '않은 것처럼' 장악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치 ~아닌 것처럼'은, 객관적인 질서의 변화 없이 정신 안에서만 변혁을 이루는 안일한 보수주의로 얼핏 오해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이 주석하듯 "현세적 상태의 폐지(~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는 현세적 상태를 그 자체로부터 해방시켜 현세적 상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일상을 혁명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니체와 바울 : 서로 경쟁하는 두 파괴자

 

바울이 지닌 폭발력으로 인문학의 비판 정신을 다시 젊게 하려는 노력은, 니체의 해석으로부터 바울을 빼앗아 온다는, 나아가 니체의 선구자로 바울을 발견한다는 철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니체는 바울을 우리가 가진 긍정적인 힘을 원한이나 가책으로 변질시키는 사제로 보고 자신의 최대 적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철학자들이 즐겨 발견하듯 니체 안에는 바울이 있다. 바디우가 말하듯이 "니체는 바울의 적이라기보다는 경쟁자이다. 두 사람 모두 인류 역사의 또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동일한 염원, 인간은 극복될 수 있고 또 극복되어야 한다는 동일한 확신, 죄의식 및 율법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동일한 확실성을 공유하고 있다."

니체 저작의 중요 대목에서 우리는 바울에 대한 흥미로운 패러디를 만날 수 있다. 가령 니체는 자신이 영원회귀의 영감을 어떻게 받았는지 '위대한 정오'라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에서 둘로 /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지나갔다."

이렇게 갑작스런 영감을 받는 니체에게서 우리는 바울의 다마스쿠스 체험을 발견한다. 타우베스가 <바울의 정치 신학>에서 지적하듯 "니체가 자신의 경험을, 즉 영원회귀의 신화를 환각적 경험으로 해석했다는 사실, 더욱이 바울의 다마스쿠스 체험을 묘사할 때 썼던 바로 그 은유들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는 사실"과 우리는 맞닥뜨리는 것이다.

바울은 니체와 마찬가지로 긍정의 사상가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오'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 ('Ⅱ 고린토' 1 : 19)

또한 바울은 현행적인 가치들을 보호하는 도덕법들을 전복하려 했던 니체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해체하려 한 자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갈라디아' 3 : 13)

현재의 가치들 앞에서 니체가 망치를 들어 올렸다면, 바울은 당대의 율법 앞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전복'이 바울이 최근 인문학에게 갖추기를 호소하는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힘이다.

 

 

법의 폐지 또는 프루스트적 바울

 

니체가 이미 <아침놀>의 68절에서 세세히 분석하고 있는 바울의 주제가 있다.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현대 사상가들을 매료시키는 바울의 이 주제는 가치의 전복, 바로 '율법의 폐지'로써, 바디우와 아감벤 같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기 위해 매달렸다. 바디우는 말한다.

"바울의 계획은 보편적인 구원론은 어떠한 법과도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라는 사건은 본질적으로 단지 죽음의 제국일 뿐인 율법에 대한 폐지이다."

왜 율법의 폐지는 우리를 해방으로 인도할까? 바울은 쓰고 있다.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는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로마서' 7 : 7∼10)

욕망이 어떻게 부정적으로 법에 예속되는지 이보다 더 탁월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리라. 율법이 없었다면 욕망은 율법이 금지하는 대상과 연결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율법의 출현과 더불어 욕망은 율법이 금지하는 대상을 자신의 목표 지점으로 가지게 된다. 애초에 욕망과 특정 대상이 연결되어 있어서 법이 욕망에게 그 대상을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법의 금지 때문에 욕망이 그 금지의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서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율법이 욕망을 죄짓도록 만드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은 무엇보다 기존의 법의 폐지를 통해서만 전망해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아감벤이 율법 비판과 관련하여 바울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그의 독특한 '시간관'이다. "모든 것은 메시아 안에서 반복된다"('에페소' 1 : 10)는 말이 알려주듯 바울의 시간이란 바로 '반복'의 시간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반복과 만회(Gjentagelse), 니체의 영원회귀, 하이데거의 반복(Wiederholung) 등 서구에서 출현한 빛나는 반복 사상들의 가장 앞자리에 오는 바울의 반복은 물론 계절의 순환 같은 자연의 반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반복인가?

바울은 말한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로마서' 13 : 9∼10)

여기서 과거의 율법은 현재 메시아의 가르침인 '사랑' 속에서 '반복'된다. 사랑이라는 이 메시아적 현재 속에서 반복되면서 과거의 율법은 비로소 제대로 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은 아감벤이 말하는 것처럼 '즉결 심판(summary judgment)'이라 불리만 하다. 과거의 율법들이 '심판(judgment)'을 받아 사랑이라는 참다운 의미로 '요약(summary)'되니 말이다. 헤겔식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이는 율법의 '지양(aufheben)'인데, 지양은 철폐와 보존 두 가지 모두를 뜻한다. 과거의 율법을 '철폐'하고 그것을 사랑의 형태로 '성취'하는 일.

이러한 바울의 반복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근 활발히 새로 번역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가르침을 참조해야 될 것이다.

 

바울의 반복이야말로 가장 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이니까 말이다. 시간을 되찾는 프루스트의 작업은 한 마디로 무엇인가?

과거의 사건이 지닌 참다운 의미는 당시에는 몰랐다가, 지금 다시 기억해낼 때, 즉 지금 반복하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레오니 고모 집에서 맛보았던 마들렌과 홍차의 의미는 '그 당시엔 결코 알 수 없고 지금 다시 반복될 때에야 비로소 주어진다' 바울의 율법도 마찬가지다. 지금 메시아가 출현한 시간에 율법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반복됨으로써 참다운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지, 구약의 시대에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과거의 율법을 폐지해 역사를 두 동강이 내고 현재의 시대를 열건, 과거의 율법을 심판해 사랑이라는 메시아 시대의 의미를 얻어내건, 율법 철폐라는 바울의 작업은 인문적 정신이 인간의 삶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 것인지 가르침을 열어준다. 그것은 절망, 무기력, 타성, 두려움이 발목을 잡을 때마다 망치를 꺼내들고 삶을, 그러므로 역사를 수리하라는 가르침이다.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 ( tyio@press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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