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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삶 3-소멸의 아름다움
08/05/2020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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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마음으로 사는 삶은 외로움도 서러움도 아닙니다.

 

오늘은 안개가 자욱합니다
"검 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요......"
이 아침의 바다는 김 민기 님의 노랫말을 닮았습니다.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짙은 안개로 수평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길섶에 주차를 하고 내리면 검은색 체인 링크로 된 난간 옆에는 쓰레기 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로 주변이 어지럽습니다. 체인 링크 난간은 중간, 중간이 끊겨 나가고 난간너머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모래 사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가에는 물새가 모래 톱을 뒤적이고 한가한 갈매기가 원을 그리며 납니다. 주섬, 주섬 쓰레기를 치우고 먼 바다를 바라보며 눈을 감습니다.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던 일들을 바라봅니다. 어제의 기억이 오늘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기억되어 지는것과 기억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왜 발생하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을 충만하게 살아 내기 위해 기억으로 남은 머리속의 영상들을 바라봅니다. 들숨으로 각인된 기억들을 모으고 날숨에 실어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던집니다. 하나 둘, 기억의 파편들을 태양을 향해 던지고 나면 마침내 모든 기억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나는 기억이 사라지고 남겨진 텅 빈 공간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진 공간에서 일체가 사라진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마저 지웁니다. 모두가 사라지고 無我의 맑은 고요가 찾아옵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슬픔과 기쁨, 외로움, 분노, 걱정-사단 칠정의 굴레가 저를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인식의 주체가 사라진 까닭입니다. 죽음-영원한 이별이 주는 불안과 슬픔,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최 영주, 생명-1

대부분의 명상(또는 종교적 행위)이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유사 합니다. 자아를 버리고 궁극적인 眞我를 찾아 가는 여정은 같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이나 기독교의 사막의 교부들이 은둔과 명상을 통해 추구했던 인간 해방에서 한 예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답들을 이야기하지만 완전한 답은 없습니다. 제시된 답들의 문제가 아니라 제시된 답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실체가 각기 다르고 미처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바라보기에 완전한 수용과 합일의 어려움을 남기는 것입니다.

 

일례로 고난의 이유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글들, 강의를 들어봅니다. 대체적으로 두 범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난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유익하다는 추론입니다. 고난을 통해 인간은 성숙해진다는 것이지요. 설득력이 있는 논리지만 총체적으로 받아 드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 진다지만 폭우는 지반 자체를 무너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더 빠른 출발을 위하여 한발을 뒤로 내 딛지만 뒤로 내 딛은 한발이 낭떠러지인 경우도 종종 봅니다. 오를 수 없는 깊은 절벽에 떨어진 사람에게 성숙은 먼 이야기입니다. 생명이 전하는 말-사는 일이 먼저입니다.

두번째 경우는 원죄 내지는 전생의 죄가 오늘의 고난의 이유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논리가 현재의 고난을 수용하고 극복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한점의 의혹없이 동의할 수 있는가?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고 받아드릴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속성 중 하나인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전제한다면 어려운 삶의 조건들(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기근을 견디어 야 하는 어린 아이들의 고통)속에 내 던져지는 인간의 삶에 대하여 전지 전능하신 신은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인가? 차라리 태어나게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굳이 기독교적 시선을 추가 한다면 능히 견딜 수 있는 고난만 허락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중거니: 11:1

성경이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와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느 누구의 답변도 두 가지 유형을 벗어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불가지론으로 몰아 갈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인간의 지력 밖의 일이라 치부하고 잊어도 그만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외면하거나 묻어둔다고 탓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삶의 실체를 냉정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고통을 좋아하지는 않는 다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비껴 가고 싶지 않습니까?

 

고난을 말하는 탁월한 책-욥기를 읽을 때 마다 떠오르는 것은 내가 당사자 욥이 아니라 욥의 하인, 욥의 자식이라면?  하는 의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 욥이 되어야 만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삶의 문제는 편파적으로 다루어 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의 예외가 다른 이 에게는 총체적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탑골 공원-옛날에는 파고다 공원이었던 자리에는 노인들이 넘쳐 납니다. 마땅히 갈 곳 도 없고, 집에 있자니 답답하고, 돈도 넉넉치 않아 여행을 기획할 수도 없습니다. 황혼의 세대는 갈 곳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탑골 공원의 노인중에는 6년차, 7년차. 심지어는 15년 차도 있습니다. 빈 부 격차가 심화되고 기존의 가족 제도는 이미 무너 진지 오래. 설사 지난 세월처럼 자식의 부양이 가능하다 해도 황혼 세대는 원치 않습니다. 자식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는 않은 까닭입니다. 그저 사는 날까지 아프지 않고 자식에게 걱정 끼치지 않고 살기만을 소원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독거 노인의 문제입니다. 홀로 사는 노인들은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거 환경도 열악한데 몸에 병이 들고 거동이 불편해지면 두려움과 외로움이 쌓이게 됩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곁에 두고 삽니다. 이렇듯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도 놓치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와 슬픔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 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자아 인식, 자유, 고결함, 사랑하는 능력을 심화시키지 않은 채 남이나 세상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사람은 남에게 줄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강박 관념, 공격성, 이기적 야망, 목적과 수단에 대한 그릇된 신념, 교조적인 편견과 사고방식을 남에게 전달할 뿐이다.” 자아 성찰과 삶에 대한 깊은 고뇌의 필요성을 강조한 이 시대의 저명한 수도사이자 저술가인 토마스 머튼의 말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해 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다루기 쉽지 않고 버거운 주제이지만 피 할 수 없는 주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굳이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깊이 생각해야 하는 주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평생을 공학도로 살아온 제게 인문학적 주제를 다룬다는 것도 힘드는 일이지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도구라는 의미로 나태해지기 쉬운 제 자신을 채찍질한다고 나 할까요? 언젠가는 마주처야 할 것들을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여 제 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그저 세상에 회자하는 잡문 중 하나라 여기시고 중간에 나 가셔도 좋습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글쓰기는 제 자신의 자기 성찰의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살면서 우리는 많은 죽음을 보게 됩니다. 일가 친척, 가까운 친구의 부모님, 친구들, , 후배…. 나이가 들어가며 이루 헤아리기 힘든 많은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제가 목도한 첫번째 죽음은 제 아버님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맞이하게 된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늘 병상에 계셨던 기억 밖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이별이 주는 외로움은 어린 저에게 커다란 아픔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고 얼마간은 이별의 아픔조차 모르고 지낸 것 같습니다. 그저 친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여느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정작 아버님을 여읜 아픔을 절실히 느끼게 된 시점은 무심한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과 함께 지내던 방문을 여는 순간이었습니다.  병풍으로 가리워진 아버님의 관이 놓였던 그 자리에 찬바람이 불고 가눌 수 없는 슬픔이 저를 엄습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렇지, 돌아가셨지. 다시는 볼 수가 없지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저는 방문 앞 툇마루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안타까운 죽음도, 아무리 미사 어귀로 포장된 죽음도 육신을 가지고 사는 이들의 이별의 아픔을 물리치기는 힘듭니다.

 

가장 안타깝고 깊은 상처를 남긴 죽음은 제 큰 아들의 죽음입니다. ‘부모는 죽어 산에 묻고 자식은 죽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세월 지나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시시 때때로 깊은 슬픔의 늪으로 몰아가는 경우는 경험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죽어 한줌의 재가 된 큰애를 세상 어느 곳에도 놓아 둘 수 없어 품에 안고 돌아와 제 서재의 책상머리 영전 사진뒤에 두고 매일 인사를 합니다. 엄마는 큰애는 천국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말을 건네지만 위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들에 관한 슬픔을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오늘 쓰고 있는 글의 주제가 아닌 만큼 비껴 갑니다마는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눈물이 흐르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사별은 주체하기 힘든 슬픔이요 아픔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기에는 무거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무겁기 때문에 엄연히 실존하는 문제를 비껴 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다른 표현은 삶입니다. 우리는 죽음과 현재의 삶을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죽음을 포함한 많은 내일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됩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우스 수도 원장도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혼자서 고요히 앉아 있는 사람은 듣고 보고 말하는 일에서는 피신했지만 그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계속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달아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우리에게 닥친 모든 것을 더 깊게 깨닫고 받아들이며 살기 위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이런 인식이 우리를 영원한 이별-죽음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 달아야 한다

 

토지의 작가 박 경리 선생은 그녀의 유작 수필집에서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삶은 영원의 삶을 지향하는 과정이고 때가 되면 버리고 가야하는 삶의 편린이요 지우고 떠나야 하는 기억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물질적인 것이 소멸되어 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모릅니다. 현재 세계 인구는 78, 지난해 보다 8000만명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올해 현재 사망자가 오늘 현재 3480만명,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사망자의 수는 더 늘어나겠지요. 철새를 비롯 각종 가축 등에 발생하는 질병도 끔찍합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생 매장시키는 일인데, 만약 매장된 것들이 소멸되지못한 채 지하에 그대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 입니까? 자연이 순환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물질적인 것들을 소멸시켜 본래의 상태로 돌리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는 사실은 기쁨입니다.  감사의 원천입니다.

 
피아노의 거장, 찰리 채플린이 진정한 천재라고 불리웠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에 관 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루마니아계 유태인으로 태어난 그녀는 한창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던 18세의 나이에 "다발성 경화증"-모든 신경과 근육이 굳어지는 병을 얻어 더 이상 피아니스트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미 지병으로 인해 몸은 몸 대로 굳어지고 20세의 나이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되어 버린 여류 Pianist. 그녀의 삶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23세에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마저 잃고 이어 발발된 1차 대전의 포화 속을 지병으로 인해 침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긴 시간을 그녀는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그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녀는 어떻게 받아 드렸을까?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후에도 그녀는 돌보아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병상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녀가 죽기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평생을 벼랑 끝에 서서 힘들고 아슬 아슬하게 살았지만,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지요.
그것은. 신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죽음은 신의 축복이었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생각의 전환이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 박종호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참조)

이제는 영면에 든 영국의 저명한 물리 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 그는 22살의 나이에,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루게릭 병-근위측성측삭경화증-에 걸려 시한부의 생명을 선고받았으나 이를 극복하고 과학자로써 최고의 명예인 케임브리지 대학 석좌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난치병에 걸렸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내 병에 대한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사는 것이 따분했다. 이제 하루하루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나날이 될 테니까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는 시한부의 생명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고하고 76세에 영면에 들었습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의 고백은 죽음이 오히려 삶을 의미 있게 한다는 역설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단절이 아니라 삶의 연장,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더불어 천재 과학자의 삶은 인생에서 정신이 차지하는 가치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패가 기회요 고난이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경우입니다. 

이미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죽음이라는 명제에 대해 제가 통쾌한 결론을 내리라고는 생각 지 않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삶의 연장이요 소멸을 통해 순환되는 과정의 일부로 죽음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직시해야 할 문제들 앞에 떳떳하게 마주서서 고민하고, 설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의연하게 마주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빗장이 열린 마음에는 삶도 죽음도 하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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