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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카를 대제를 물리친 카르카손 Carcassonne
09/24/2018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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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발현지 루르드에서 동쪽 271km 거리의 카르카손 Carcassonne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는, 8세기경 지중해 지브랄탈 해협을 건너온 무어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하여

이슬람 사라센 제국을 건설하고, 파죽지세로 프랑스를 위협했던 한 성이 있다.







카르카스 왕비



기원전 로마가 쌓은 이 성은, 5세기경 서고트족의 통치를 거쳐, 9세기경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스는 비옥한 지중해 지방을 지키고, 유럽의

이슬람화를 저지하기 위해, 이 곳에 진격하여 성을 포위한다.





 

왕이 죽고 5년간의 포위로 군량과 식수가 바닥나자, 이 성의 기사들을 지휘하던

카르카스 Carcas 왕비는, 조금 남은 군량을 돼지에게 다 먹이고, 가장 높은 성루에서

돼지를 성 밖으로 던져, 배가 터지면서 곡물이 나오는 모습을 연출한다.




 

카를루스 Karulus는, 성 안에 아직도 식량이 많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군사들을 철수시킨다. 그는 이슬람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800여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스페인과는 달리, 프랑스와 기독교를 지켜낸다.




 

샤를 마뉴 대제(742- 814)는 프랑크 2대 왕으로, 768년 부터 47년 동안 왕국을

다스렸다. 프랑스에서는 대제라는 뜻의 마뉴를 붙여 샤를마뉴 Charlemagne,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 Karl, 영국에서는 찰스 대제 Charles the Great,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카를로 대제 Carlo Magno라 불린다.




 

카를루스, 아버지 피핀이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고 피핀 3세가 될 때 까지 

많은 전쟁에 참여하였다. 교황 스테파노 2세를 도운 공으로 아버지가

교황에게서 왕관을 받을 때, 그도 후계자로서 왕관을 받았다.

 

768 피핀 3세 사후, 경제적 기반이 빈약하였던 왕국은, 군대와 국가의 지탱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26세에 왕이된 카를루스는 매년 전쟁에 나서, 그 전리품으로

국가를 꾸리고, 군대를 강화시켰다. 그에게 있어 전쟁은 곧 외정이자 내치였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알아들었으나, 카를루스는 글을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구술로 정보를 얻었던 시절에,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큰 흠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죽을 때 까지 침대 밑에 글자판을 놔두고 연습을 하였다.

 

그러나, 치세기간 3분의 2를 전장터에 지낸 그는, 문자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여

그의 서명은 공문서에 2개의 줄을 열십자로 긋는 것이었다. 그 일로 동로마 제국

인들은 '구멍 뚫린 철판을 대고 서명하는 무식쟁이'라 하였다.

 

780년 그는 개별 글자들 끼리 모양을 다르게 해, 문해 난이도를 낮춘 카롤링 서체


Carolingan Minuscule를 만들어 문맹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문자는

서유럽으로 퍼져 오늘날 로마 알파벳 소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각지 수도원에 학교를 세워 그리스어와 라틴어 학자들을 양성하였던 그의 정책으로,

로마 그리스 고전 대부분은 이 시대에 번역되었다. 난삽한 필체로 해독이 불가능한

8세기 이전 판본에 비해, 카롤링거 시대 이후에는 그런 문제가 해소되었다  

 

카를 대제의 통치력은 기도하는 자 Oratoribus, 경작하는 자 Agricultoribus, 싸우는

Pugnatoribus’들에서 나왔다. 군대와 교회에 의해 유지되었던 당시 프랑크 왕국은,

별다른 행정적 체제가 구축되어 있지 않아, 교회가 지방 행정을 담당하였다.




 

773, 롬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롬바르드 왕으로 즉위한 카를대제는, 800 

교황에 의해, 비록 멸망한 나라의 명예직이지만 서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된다

그로인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으로 여겨진 그는

서유럽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평생동안 젊은 시절의 균형이 잘 잡힌 전사형 몸매를 유지하였다. 19세기 중반

그의 관을 열고 신장을 재 본 바, 키는 192cm로 확인되었다. 사치스런 옷보다는

모피 상의에 푸른 망토를 걸치기를 좋아했던 그는, 무기만은 고급 무기를 고집했다.




 

8세기 유럽은 카롤링거 왕조 시절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일시적인 부흥을 누려

그의 통치기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렸다. 그에 의해, 서유럽의 게르만 로망스 

문화는 동유럽 비잔티움, 중동 이슬람과 더불어 서양 3대 주요 문명이 되었다.




 

이렇게 전설적인 카를 대제를 물리친 이슬람군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카르카스

왕비는 내의 모든 종들을 치도록 하였다. 철수하던 프랑스 군사들이 종소리를 

듣고“Carcas sonne!" (Carcas sounds)라 한 것이 카르카손 Carcassonne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견고한 두개의 성 문을 지나자, 성 안에 자리 잡은 조그만 상가 마을이 나타났다.

한 식당에서 점심으로 이 곳의 전통요리, 흰콩, 고기와 소세지, 내장을 넣어

끓인 영양식 내장탕 카슐레를 먹었다.










이 음식은 전쟁 때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마을에 있던 음식들을 모아 만들었던

일종의 부대찌게 같은 것이다. 그 음식이 Cassole에 담겨져 나오면서 카슐레

Cassoulet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성 안쪽의 또 다른 성, 콩달성 Chateau Comtal을 찾아, 로마 성벽을 따라 걸으며,

성 안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카르카손에서 170km 동쪽으로 이동하여, 대학 도시 몽펠리에 Montpellier를 돌아

보았다. 지중해 해안에서 12㎞ 안쪽으로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는,

랑그도크루시용 지방 제일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이다.





매우 인상적이었던 어린이 놀이터






담배 가게 마크...




대학 도시 답게 가는 곳 마다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10세기에 향신료 수입을 위한 교역소로 건설된 몽펠리에는, 1141년 도시 설립 

인가를 얻었다. 1221년 대학교 의학부가, 1160년에는 법과대학이 설립되었다

몽펠리에대학교 자체는 1220년 설립되었고, 1289년 교황 니콜라우스 4세에 

의해 정식 인가되었다.



몽펠리에 의과대학






Montpellier Cathedral


 

루이 14세는 몽펠리에를 포도주로 유명한 랑그도크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삼았다.

오늘날은 관광 중심지가 되었으며, 포도나무·포도주 국제박람회가 열리는 곳으로

식품가공업, 야금업, 전자공업, 제약업, 직조업 등이 발달되어있다.

 

 

Porte du Peyr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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