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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分知足
08/30/2018 23:30
조회  893   |  추천   14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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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知足

 


 

<글이 곧 사람이다>란 말이 있다. 수필에서는 특히나 그러하다. 삶과 연계된 인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인 수필. 글쓴이의 사는 모습은 물론 인간미. 인생관 등이 수필에는 고스란히 녹아있다. 해서 몇 편의 수필을 읽고 나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게 된다. 그럴만큼 수필은 본모습 그대로의 진실을 기초로 한 것으로 '참'이 수필의 생명이다.


자신의 이야기도 주인공 하나 내세워 슬쩍 대입시킨 뒤 시치미 떼고 나 앉을 수 있는 소설과는 속성부터 판이하다수필은 결국 자기 고백이며 자기 표백(表白). 자신의 내면 세계까지도 가감없이 투영시키는 작업인 수필 쓰기에는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반쯤 가리운 주렴도 없이 적나라한 노출일진대 아무런 망설임이나 저항감조차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어쩔 수 없는 미완의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스스로 부족하고 모자란 자신을 여러 사람앞에 내보인다는데 이르러선 어찌 주저치 않을 수 있겠는가.


수필은 정직하여 거짓이나 가식을 용납하지 않는다자신의 면면을 올곧게 비추는 명경대가 되는 것이 바로 수필이다. 하여 수필쓰기는 자기 정리다자기 정화다. 자기 치유다.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는 작업이고 흐려진 심안을 맑히는 작업이다또한 수필은 한편의 참회 기도이자 성찰 일기이다때로는 추억을 반추하는 시간도 되고 감정의 분출구 역할도 한다그렇듯 수필은 내게 있어 언제나 <열린 창>인 셈이다. 수필을 쓸 때 만큼은 자신을 곧이곧대로 나타내게 되니 결국은 가장 자기다운 면모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작업이 수필쓰기인 것이다이처럼 <글은 사람이다>란 명제가 어느 장르보다 수필에 있어서는 적절히 들어 맞는 셈이다.


간혹 글과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접한다분위기든 색깔이든 이미지가 각각 서로 다를 때 당혹감과 아울러 어쩐지 사기란 느낌까지 든다그만큼 수필은 글쓴이의 면모가 솔직담백하게 반영된 글이라 인식된 까닭이다내용을 액면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말하자면 이를 데 없이 투명한 유리 그릇과 같댈까따라서 수필을 통해 자연스럽게 각자 삶의 안자락은 물론 일상사를 넘겨 보게 된다그러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의 공통점은 수필가 다수가 전문직 종사자라는 것아니면 주부라도 하나같이 재주가 남다르고 능력도 다양하다는 공통분모가 발견된다서도든 그림이든 자수든 악기든 다도든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이가 의외로 많다수석과 난분재 중에 즐기는 취미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기도 하다.


반면 나는 인품이나 생활상이나 두루 지극히 비 수필적이다몰취미하고 무엇 하나도 잘 하는 게 없다겸사가 아니라 도무지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한가지도 없다주부로서 응당 잘 해야 할 음식 솜씨도 보통 이하다살림을 규모있게 살아 재산 늘려 놓은 바 없고 살갑게 엄마 역할 잘 한 것도 아닐 뿐더러 효행이 두텁지도 못한 편이다. 게다가 히스테리칼한 성격에 자존심만 별나다. 그렇다고 명문가 출신도 못되며 공부가 특출났던 것도 아니고 운동은 아예 평균치에 조차 못 미친다노래든 흥이든 시원찮아 노는데 어울리지도 못할 정도의 수준이고 말 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며 재치나 센스가 뛰어난 건 더더구나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노력이라도 기울였던가한가지라도 제대로 갈고 닦아 성취시킨 바가 있던가아니다붓글씨는 길 영(永)자 쓰는 도중 진력내 버렸고 꽂꽂이는 일년을 채 못 채우고 외면해 버렸다수석에 몰두하고 난을 기르고 다도에 심취하고 사군자 치는 고아한 아취는 내 몫이 아니었다참 딱한 아낙이란 생각이 든다대책없는 한심한 사람도 같다그 상태로 어쩌자고 수필에 매달렸었는지 어이없기도 하다.


좋은 수필을 쓰자면 우선 수필적 경지를 쌓으라 한다이 대목에 이르면 그만 목이 움추러 들며 수필로부터 놓여나고 싶어진다좋은 수필 쓰기는 애시당초 글렀으니 유치한 자연예찬이나 늘어놓고 잡문 따위나 쓰며 자족해야 할 것인가참담한 기분이 든다한편진실한 생활이 좋은 수필을 낳는다는 귀절에 이르러 솔깃해 진다대체로 주어진 현실과 여건에 충실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편이기 때문이다말하자면 놓여진 그 자리에서 불평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생활인인 것이다우아한 목련화가 아니라도 괜찮다내 몫으로 주어진 조그만 풀꽃을 사랑하며 일상의 자잔한 기쁨들에 감사할 줄 안다면, 사실 행복이란 게 별 것이던가나는 키 낮은 시정인의 하나로 누항사에 깊이 파묻혀 그저 그냥 익명으로 그렇게 살고저 한다.


수필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장식달고 거창하게 시작한 것이 아니었듯 그저 단지 좋아서 쓸 따름이다좋아서 하는 일에 각고의 아픔이니 내출혈이 따를 리 없다문학 정신의 결여를 탓해도 별반 개의치 않으며 덩더꿍 제 신명에 겨워 돌아가는 춤사위에 취해 쓰는 글그러나 적어도 단순한 도취요괜한 흥분만은 아니다무언가 써야 될 이유쓰지 않고는 못 배길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므로. 그 열정의 핵을 나는 선물이라 부른다. 나아가 나는 이미 발표한 글에 깊이 집착하지 않는다글을 수용하는 것은 독자의 관할이고 비판도 감동도 그들의 몫나는 단지 지고의 선을 추구하고자 할 따름이다.


또 하나고통 끝에 피는 꽃이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나는 그런 영광은 사양하련다. 뛰어난 글로 큰 빛 되고자 처절히 아파 보고 싶지도 않다. 그만한 능력도 안되지만, 명성 얻어 떠들썩해진들 더 높아질 욕망의 사다리 타기도 피곤한 일하물며 글로 이름 석자 후대에 남기고자 함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 욕심인가. 문장가로 드날린들 그때 그 이름이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며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다만 살아 생전 제 이름에 때는 묻히지 말 일이다언제나 나 자신과 매 순간에 성실할 수 있다면야 그 이상 달리 바랄 것이 있을까 싶잖다생각해보면 그 때문에 수필을 써 온 것은 아니었던가.


민망스런 얘기지만 그러나 나는 뚜렷한 수필론이 정립된 바도 아니고 수필관이 확고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지성이 받침된 인격체 운운하면 숨어버리고 싶어진다. 이론도 약하다. 다만 쓰고 싶다는 욕구가 늘 충일하다. 그득 차서 넘치는 데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노릇 아닌가. 다작(多作)은, 글의 남발은 분명 자랑거리가 못된다. 한편한편에 신중을 기하고 퇴고를 거듭하여 조심스럽게 발표하기보다, 설익고 여과되지 않은 채로 마구잡이 방류하는 식은 지양되어야 함에도 나는 늘 그러하다. 올해는 작정하고 글을 적게 쓸 참이다. 아니 쓰긴 쓰되 성급한 발표는 되도록 삼갈 생각이다. 이제야 좀 철이 드는 것인지....

 

도처에 무수히 숨어있는 수필의 소재들이 눈짓을 보낸다드러나지 않았을뿐 무궁무진한 재료들매일 색다른 감동없이 마주한 사람들과 자연 그리고 도시가 어느날 뜻밖의 느낌으로 다가설 적이 있다또한 별스럽지 않은 일상사에서 참신한 글감을 만나기도 한다평범함에 묻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내가 거두어 줄 때의 기꺼움을 위하여, 하잘 것없는 사물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건져내기 위하여 나는 즐겨 창가에 서는 지도 모른다<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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